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문단 편집) == 배경 == 1740년 10월 20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가 사망하였다. 카를 6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기 이전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주로서,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 [[헝가리 왕국|헝가리]], [[크로아티아 왕국|크로아티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현재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그리고 [[밀라노 공국]] 등 [[이탈리아 반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광활한 지역을 통치했다. 그의 외아들 레오폴트 요한은 1716년에 사망했는데, 먼 친척에게 영지가 넘어가는 대신에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자]]가 되기를 원했다. 또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계승 문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 계승과도 관련이 있었다. 비록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9명의 [[선제후]][* 1356년 [[카를 4세]]의 [[금인칙서]]로 공인된 선제후는 7명이지만 시간이 흘러 [[바이에른 선제후국|바이에른]]과 [[하노버 왕국|하노버]]가 추가되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에는 9명이었다.]가 투표하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계속 합스부르크 왕가가 황제 자리를 독차지 하고 있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차지하고 있던 [[보헤미아 왕국|보헤미아 왕위]] 자체가 1명의 [[선제후]]이기도 했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왕가를 계승하는 자는 거의 차기 황제가 되는 것과 같았다. 또한 직접적으로 제위를 노리지 않더라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상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선제후들이 황제 선거에서 합스부르크 왕가를 지지하는 대신에 과도한 댓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차후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 지역을 요구한 것이 그런 예이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 계승은 당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일단 급한 문제는 어디까지나 누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비롯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 로마 제국 내 영토를 상속하는게 되는가였다. 문제는 아주 예전의 [[프랑크 왕국]]에서부터 내려온 [[살리카법]]이었다. [[필리프 5세]] 시절 확대해석된 살리카법에 의하면 '''[[여성]]은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없었다.''' 그리고 [[독일어권]]을 포함하여 옛 프랑크 왕국의 영토였던 곳들에서는 이 확대해석된 살리카법이 철저하게 지켜졌다. 또한 합스부르크 왕가 특유의 전방위적인 [[통혼]] 정책 때문에 유럽 각지의 유력 가문에 오스트리아 상속을 주장할만한 남성들이 있었다. 사실 수 십년 전에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 합스부르크]]의 국왕이었던 [[카를로스 2세]]가 [[아들]] 없이 죽으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왕위가 [[보르본 왕조|부르봉 왕조]]로 넘어가는 것을 경험했던 카를 6세는 즉위 초 일찍부터 계승 문제를 염려해서 살리카법의 여성 왕위 승계 금지 조항을 무력화 시키는 [[국사조칙]]을 내놓았다.[* 국사조칙은 어디까지나 보험용이었다. 국사조칙 이후 장남 레오폴트 요한이 태어났다가 7개월만에 요절하고 마리아 테레지아와 딸 둘이 더 태어났다. 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아들 낳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이걸 내놓은 건 자신이 아들을 못얻을 경우를 대비한 보험이었으며, 만약에 직계 자손으로 여성만 남게 되어도 분란 없이 가문의 영속성을 이어 나가기 위한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카를 6세는 국사조칙을 내놓는 동시에, 이런저런 정치적 수완과 합의를 동원하여 왕위를 요구할만한 친척들로부터 자신의 사후에도 국사조칙을 지킬 것을 맹세받았다. 대표적으로 형 [[요제프 1세]]의 사위들인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7세|카를 알브레히트]],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 등이 그 대상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비록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수장인 카를 6세의 장녀이기는 했지만, 카를 6세에게는 형인 요제프 1세와 그의 딸들이 있었기에 본래대로라면 요제프 1세의 딸들이 지닌 계승권이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더 높았다. 카를 6세가 국사조칙을 수정하면서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권이 조카딸들의 계승권보다 우위에 서기는 했으나 이는 염려스러운 사안으로 남았다. 게다가 카를 6세의 말년이 또 신통치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1737~38년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러시아]] 연합군이 [[프랑스 왕국|프랑스]]와 [[스페인]]에게 사실상 패하면서 [[나폴리 왕국|나폴리]], [[시칠리아 왕국|시칠리아]] 등 스페인에게 빼앗겼고 외부 세력이 오스트리아를 얕보기 시작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지원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가 [[아우구스트 3세]]로 즉위하며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트 3세에게 밀려 왕위를 빼앗긴 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에게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자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는 [[프란츠 1세]]의 영지인 [[로렌 공국]]이 주어졌다. 프란츠가 마리아 테레지아와 혼인을 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자기 나라 앞마당에 오스트리아 영토가 세워질까 경계한 프랑스가 혼인 승인을 조건으로 영지인 [[로렌 공국]]을 내놓으라 요구했고 프란츠는 [[울며 겨자 먹기]]로 로렌을 프랑스에게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가 얻은 로렌은 [[루이 15세]]가(스타니스와프의 사위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빼앗긴 스타니스와프에게 보상으로 줬으며 후사가 없던 스타니스와프가 사망한 뒤 프랑스가 그대로 합병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치뤄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참패하여 [[벨그라드 조약]]으로 동부 지역의 영토 상당수를 잃어야 했다.[* 1718년 빼앗은 [[합스부르크 세르비아|세르비아]] 북부와 [[왈라키아 공국]] 서부의 올테니아 일대. 여담이지만 이는 오스만 제국이 독자적으로 유럽 국가에 승리한 마지막 전쟁이었다.] 두 차례의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모두 크게 패하면서 오스트리아의 내부 결속력이 약해지는 모습이 보이자 주변국들은 오스트리아를 뜯어먹을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를 6세의 건강이 악화되자 주변국들은 카를 6세와 합의한 국사조칙을 지킬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특히나 카를 6세의 형 [[요제프 1세]]의 딸들과 결혼한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7세|카를 알브레히트]]와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는 국사조칙 승인을 거부하였으며, 오스트리아의 숙적인 프랑스는 이때다 싶어서 카를 알브레히트를 지원하며 끼어들었다. 이렇게 살얼음을 위를 걷는 듯이 불안한 상황에서 1740년 10월 카를 6세가 사망하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하였다. 그리고 뜬금없이 프로이센의 젊은 군주인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으로 진군해 들어가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